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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에 관하여

메리 셸리가 19세의 나이에 써낸 <프랑켄슈타인>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가 만든 피조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실험 끝에 생명을 창조해내지만 그 생명체의 흉측한 모습에 놀라 그 생명체를 내팽개치고 달아나버린다. 자신을 만든 이에게 버려지고 세상을 떠돌던 괴물은 자신의 흉측한 외모 때문에 사람들에게 배척 받고 깊은 고독감에 빠진다. 괴물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창조주에게 분노하면서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같은 고독감을 느껴보라며 그의 주변인을 하나하나 없앤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자신과 같은 존재를 만들어주면 조용히 사라지겠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자 분노한 괴물과 박사는 쫓고 쫓기다가 북극에서 마주한다. 그러나 빅터는 너무 지쳐있었고 결국 북극을 탐사하러 온 탐사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사망한다. 괴물은 그의 죽음에 착잡 해하며 자신의 존재를 태워 후세에 알리지 않도록 하고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이 소설 속 피조물은 2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로는 우리의 선입견으로 ‘괴물’이 된 사회적 약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피조물(괴물이라 부르고 싶진 않다)의 존재를 더 잘 보기 위해선 작가인 메리셸리의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최초의 페미니스트와 최초의 아나키스트 사이에서 태어난 지식인이었다. 그녀는 19살에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낼 정도로 유망한 천재였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이 여성작가에게 가진 인식은 밑바닥이었기에 메리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필명으로 책을 출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인 오스틴이나 브론테 자매 같은 당대 여성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약 10여년이 지나고 나서야 메리는 자신이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남성중심적 문학계에서 여성 작가였던 메리는 자신을 투영한 피조물이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피조물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를 대변한다. 그저 주류의 외모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조물은 지탄받고 “괴물”이라 불리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람들에게 괴물 이었을 뿐이다. ‘괴물’은 원해서 그러한 외모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정할 수 없었던 것에 차별 받던 괴물은 자신을 만들고 책임지지 않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분노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괴물의 순수하고 깨끗한 아이 같은 내면을 직시하지 않고 흉측한 겉모습만 보고 도망쳤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우리에게 멀지 않다. 왜냐하면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우리 자신 그 자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은 한번도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한 적이 없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인간은 ‘다름’을 두려워한다. 그렇기에 자신과 다르다고 남을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피하며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하지만 과연 누가 괴물인가? 괴물은 그저 우리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괴물이라 불렸을 뿐인 것이다. 디즈니 수작 중 하나로 꼽히는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작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콰지모도는 프롤로 교주의 양아들로 꼽추이다. 흉측한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콰지모도의 선량한 마음을 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의 모습을 보고 야유하며 음식물을 던진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가장 괴물인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파리 최고의 권력자이자 가장 존경받는 클로드 프롤로 주교이다. 편견은 정말 편리한 장치이다. 근거 없이 이유 없이 미워하고 넘겨짚어 본질을 흐리기엔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말한다. 치명적인 편견이 그들의 눈을 가려 다정하고 상냥한 친구 대신에 징그러운 괴물만을 보게 된다고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이 쓰인 지 2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담겨있는 것 같다. 인종, 종교, 사상, 성적 지향성, 경제력, 지역, 나이 등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까지 저 포도는 신 포도라 외치는 우매한 여우처럼 사람의 본질을 보지 않으려 하지 마라. 겉으로 보기엔 흉측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지만 내면을 보면 얼마나 안아주고 싶은 존재인가. 아직도 우리는 스스로 괴물을 만들며 스스로 괴물이 된다. 진짜 괴물은 피조물이었나 아니면 나 자신이었나.

둘째, 과학기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은 프로메테우스, 프랑켄슈타인에 관한 이야기다.

1964년에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라는 작품이 있다. 이 영화는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 개발 전쟁을 하다가 두 나라를 포함한 모든 세계가 망해버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대사가 있다. 바로 “일본군은 잔인했지만 카메라는 죽이게 잘 만든다. 나는 이를 이해할 수 없다”라는 대사이다. 이는 인간이 양자역학, 핵물리학 등 엄청난 지식들을 발견했으나 그에 반해 인간의 의식은 성숙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문제를 회피해 버린다면 결국 파멸할 뿐이다. 프랑켄슈타인 속 피조물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버림받는다. 처음 깨어나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을 보았을 때 괴물은 씨익 웃는다. 그리고 그 웃음에 박사는 소름이 끼치는 걸 느끼고 도망쳐버린다. 괴물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중 <난 괴물> 가사.사진출처;https://blog.naver.com/safari17/60211318341

이 가사는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중 <난괴물>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괴물은 자신은 태어난 이유가 없나 하고 좌절한다. 현재도 필요에 의해 괴물처럼 만들어지고 필요가 다하자 버려진 존재들이 있다. 우리는 더욱 예쁘고 더욱 귀엽고 더욱 우리의 욕구를 충족해줄 수 있는 애완동물을 만들기 위해 다른 종과 자연에서 일어날 수 없는 교배를 시키고 유전자를 배합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저 귀엽지 않다고 키우기 힘들다고 소리를 낸다고 버려버린다! 또한 인간들은 인간들이 보고 즐기기 위해서 교배를 통해 생명체를 만들고 이를 동물원에 전시한다. 동물들이 자신의 통제 밖에서 벗어나 더 이상 “쓸모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되면 우리는 그 동물을 그냥 사살해버린다. 대전동물원에 탈출해 저항하지도 않았는데 사살되고 박제된 퓨마 호롱이를 생각해보라. 만들어진 존재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얼마나 어이가 없겠는가! 원해서 만들어놓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니!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서 카메라의 비유같이 우리는 과학기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의 자멸이었다. 자신이 만든 존재에 의해 모든 것을 잃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다 써서 필요가 다하면 그냥 버리면 되니까. 편하고 쉬우니까. 그 결과 지금 태평양은 플라스틱으로 우린 물이 되었다. 과학기술은 생활 전반에 나타날 수 있는 윤리. 환경적 문제를 남긴 채 삶을 개선할 수 없다. 그렇기에 과학기술은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며 과학기술자와 정부. 시민단체. 개인 모두가 도덕적 책임감을 가져야만 하는 대상인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책임으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우리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프랑켄슈타인은 이미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이영지  lindsey07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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